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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 2020 Winter2020년 12월

주곡리에서 첫눈을 기다리며

글 김병용 소설가

해가 눈을 뜨는 시간 
해가 뜨면 마을 전체가 일제히 눈을 뜬다. 늦을세라, 나 또한 방 문부터 활짝 열고 방안 가득 햇살부터 받아 채운다. 
주곡리 신상길 21-5. 고방과 부엌이 따로 있고 방 세 칸인 전통 가 옥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내가 이곳 주곡리에 들어온 이래,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가장 많 이 던지는 질문. 
이렇게 햇빛이 맑고 따뜻한 것을 왜 내 젊은 시절엔 몰랐을까? 팽 나무와 느티나무가 저처럼 오래 늠름하게 서 있다는 것을, 가을 나무 중에 처연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것은 감나무라는 것을…, 왜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일까? 까치와 물까치와 산까치, 때까치가 서로 다른 얼굴이라는 걸 난 왜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어디 이뿐이겠는가! 고창 땅콩은 내가 이제껏 먹어본 가장 맛난 땅콩,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여간 분하지 않다. 문수사 가을 단풍을 이제야 만나다니…,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젊 은 날의 단풍 지도는 더 풍요롭게 그려졌을 것이다.
해가 질 때까지 집 마당은 온통 햇빛의 차지다. 마당에 그득하게 고여 찰랑이는 햇살 아래 거의 하루 종일 이부자리와 옷가지들을 널어두고 마루 위에 앉아 앞마당과 그 너머 산언덕, 산언덕 위 구 름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것이 요즘 내 오후의 소일거리다. 
원래 여기 들어올 때는 그동안 써왔던 장편 한 편을 탈고하자는 계획을 머리에 담고 왔으나, 주곡리 앞마당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해바라기하는 일이 훨씬 더 좋으니 어쩌겠는가. 마음 기우는 대 로 몸도 따라 움직인다. 손바닥 위에 햇빛 한 줌 올려두고 그 햇살 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일이 내 마음의 무게를 재는 일보다 어찌 더 가볍겠는가. 바람 부는 날과 구름 많은 날의 하늘 풍경을 살피 는 일은 책 한 권 읽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 앞집 감나무에 잔뜩 매달려있던 풋감이 마침내 붉게 익자, 며칠간 물까치떼와 참새떼 들이 번갈아 찾아와 조금씩 조금씩 쪼아 먹더니 이제 서너 알만 남았다. 저 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감나무에게 일러줘야 할 텐데…, 내 눈이 다 세기도 전에 새들은 날아가버린다. 내일은 꼭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죄다 이름을 적어놓을 거다. 


달빛 아래 골목길 
여기 와서 보니 주곡리는 아직도 고흥유씨 집성촌의 면모를 고 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가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온 지는 근 사 십여 년. 주곡리에 있다 보면 문득 40여 년 전 내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런 착시(?)가 가장 심한 시간은 동네 초입 느티나무 위로 달이 떠오를 때. 아직 채 해거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늘엔 달이 뜬다. 해와 달이 서로 교차하며 짧게 인사를 나누는 시간. 달이 높이 올 라갈수록 땅거미가 짙어지고 집집마다 불이 켜진다. 하늘엔 해 와 달, 사람들의 마을엔 각각의 별이 뜬다. 밤하늘에 뜨는 별과 마 을에 뜨는 별이 얼추 비슷한 방위에 자리를 잡고 마주 보며 빛나 는 듯한 착각…. 
햇빛은 마루에 가만히 앉아 무르팍으로 느껴도 충분한데, 달은 서서 반겨야 하고 우물가라도 서성이면서 달빛을 붙들어둬야 한 다. 골목길의 정취는 달빛을 받아야 제맛이다. 보름달은 보름달 대로 초승달은 초승달대로 골목길을 환히 비추다 어둑하게 비춘 다. 달빛을 받으며 마실길을 나서면 월요일이나 화요일 저녁은 고즈넉하고, 금요일 저녁은 어쩐지 흥겨울 때가 많다. 아마 이게 요즘 내 생활 리듬일 게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엔 골목에 잘 나가 질 않는다. 대처에 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골목의 주인이고 나는 이 골목의 손님이다. 주중 내내 저녁이면 불빛만 반짝이던 집집마다 도시에서 돌아온 아들, 딸, 손주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새어 나올 때…, 나는 정겨움과 외로움을 함 께 느낀다.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시간이 흐르듯이 
시간이 흐르고 물이 흐르듯이 사람의 삶도 흐른다. 나의 삶은 여 기 주곡리로 흘러 스며들었다. 내 삶에 수많은 시간과 인연이 스 몄듯이, 나는 올가을 이곳에 우연찮게 스며든 나그네. 나를 이곳 으로 이끈 것은 두 그루 둥구나무였을까, 마당 가득한 햇살이었 을까, 오래전 함께 일했던 이들과의 인연이었을까? 
선친은 총각 시절 3년여를 고창에서 지냈다 했다. 그때 아버지가 고창 어느 곳에서 지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그 아쉬움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그때 아버지도 나처럼 해가 뜨고 달이 가 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아버지를 생각하다보니, 문득 진안에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는 7대조 할아버지도 떠오른다. 그 어른은 어디서 출발해 내 고향 에 스며든 것일까? 그 위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어디로 집터를 옮겼을까? 
주곡리 생활 3개월째. 나는 내게 지금 허락된 주소와 내 정처없음을 생각하고, 오래오 래 이어진 내 핏줄의 긴 여정을 생각하고,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땅과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을 살펴준 해와 달을 또 생각한다.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달은 예전에 옛사람을 비추었지’라고 노래한 옛시인의 글도 문득 떠오른다. 어쩌면… 나는 언젠가 이곳 고창에 살던 조상을 둔 후손이며, 언 젠가 이곳에 살게 될 나도 모를 후손들의 먼 조상일지 모른다. 그 리고, 그 길고 긴 인연은 끊이지 않지만, 대개 잊히는 게 상례. 
2020년 가을과 겨울 사이. 나는 고창읍 주곡리에 살았고 이곳에 서의 생활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아 니, 이미 나는 변하고 있다. 
나는 이 겨울 주곡리에서 첫눈을 맞을 거다…, 그리고. 나는 또 새 로운 세상과 경험에 첫 눈을 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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